Exhibition
Sunny Kim | Echo
써니킴 | 메아리
INSTALLATION VIEW “Echo”, 2024. Courtesy of the Artist and A-Lounge.
피안의 풍경 – 써니킴,《메아리》
한 소녀가 바위 끝에 서 있다. 곧게 서서 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소녀가 눈앞의 풍경 속으로 내려가기에는 그녀가 선 바위 아래가 벼랑이다. <precipice(2021)>에 등장하는 소녀는 더 이상 내디딜 수 없는 풍경에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풍경 속으로 대신 내려가도록 이끈다. 이제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야 할 차례라고 하는 것처럼. 써니킴의 작업에 오랫동안 등장해 온 소녀들이 모두 그랬듯이 이 소녀 역시 교복을 입고 있다. 교복은 특정한 시절 동안만 입을 수 있는, 유한한 시간인 것이다. 그들은 오직 그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 대신 그들은 무한한 풍경 안에 고인 시간에 기거한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모른 채, ‘현재’였던 ‘과거’에 남아 ‘야호’하고 소리친다. 써니킴이 약 20여년 전 그린 <야호 소녀들(Yaho Girls, 2002)>이 힘껏 외친 그 음성이 ‘메아리’가 되어 울리는 무한의 풍경을,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시간의 끝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소녀의 시선을 따라, 사그라지지 않는 메아리의 반향을 따라,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에 대한 기억과 경험하지 않은 추억을 되뇌는 신비한 시간이 공명한다. 이것은 배후에 있는 시간 같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이 곱씹어 보는 시간은 늘 자신의 뒤에서 째깍거리는 시침 소리와 함께 한다. 이를테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道草』의 주인공 겐조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짙게 깔린 인물로,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둘러싸고 촘촘히 얽혀 있는 배후의 시간에 대해 번민한다. “겐조는 자기 배후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끝내 잊을 수가 없었다. 평소의 그에게 이 세계는 과거의 것이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에는 갑자기 현재로 변해야 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1)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두 공간의 관계와 선택에 대해 늘 사유해야 했던 써니킴에게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겐조가 느낀 배후에 있는 세계와 유사한 메타포가 된다. 그가 그린 소녀는 인칭도, 시제도 없이 ‘교복’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 삶의 영원한 배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상기나 복기가 아니다. 베케트는 “아무리 성공적이라 해도, 상기하려는 시도는 과거의 감각에 대한 메아리”이며, 만일 지나간 감각의 인상이 우리의 현재를 자극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무는 차원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2) 자의식을 개방하여 현재 안에서 집요히 파동 하는 과거를 받아들이는 일은 써니킴에게 소녀들의 음성이 메아리치는 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꿈에서 꾸는 꿈처럼 더 흐릿하고, 더 자유로운 그곳은 소녀와 화가가 동시에 바라본 끝이 없는 풍경이다. 그곳은 어떤 공간이자 표면이면서, 기운과 대기가 교차하며 만들어낸 육중한 투명성을 지니고 있다.
INSTALLATION VIEW “Echo”, 2024. Courtesy of the Artist and A-Lounge.
써니킴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풍경들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가까운 근경을 떠안고 있는 원경만을 도려낸 것이 아니다. 그의 풍경은 모든 먼 것이 먼 채로 가까이 보인다. 먼 곳의 안, 그 숲속에 있는 바위와 나무가 물이 모두 홀연히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는 그것을 작은 채로, 흐린 채로, 그러나 가까운 것으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화면 안에 지평선을 이루며 미스테리한 구조를 형성한 겹겹의 형상은 회화적 물성의 집적과 교차 가운데 현현한다. 예컨대 <Dust>는 프레스코 벽화와 같이 바래진 시각성을 내포하면서도, 반투명하게 색을 머금은 붓질의 흔적이 무수한 레이어를 만들며 형상을 이루어간다. 그리고 불현듯 물감의 궤적이 화면 위로 흘러내리면, 거칠게 지나가는 직관적인 스트로크가 또 다른 형상의 층을 다그친다. 이러한 형식은 화가의 심리와 행위의 변화가 그대로 풍경의 깊이와 농도에 반영될 때 쌓이는 회화의 지층이다.
이번 전시에서 써니킴의 풍경은 화가의 내면에서 미리 상정된 광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가 움직이고 칠한 빛과 색의 변주를 거칠 때에 비로소 번득이는 풍경이다. 그것은 화가와 풍경과의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화면은 곧 시공의 선형적이며 보편적인 흐름이 무의미한 피안의 풍경이다. 우리는 그의 풍경 앞에서 수없이 많은 층위로 ‘멀리서 가까이 있는’ 습습한 숲과 만나게 된다. 이곳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넓이가 곧 내면의 상태와 결합된 시적인 것으로, 바슐라르는 이를 “숲의 체험”이라고 부른다. 3) 이는 소녀가 존재하는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으로, 앞과 뒤, 옆과 위의 경계가 휘발되며 하나의 숲이자 여러 개의 숲이 유연하게 뒤섞인 역설의 영토이다. 이 영토는 여러 시간의 기운으로 휘돌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움직이며 안개와 같이 붙잡을 수 없는 촉각으로 흩어진다.
써니킴에게 영토는 화면에서 생성되는 회화적 물성의 양태를 그대로 전달하는 리얼리티와도 관련된다. 그림이라는 실체는 캔버스 천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결과이며, 이 사건을 일으키는 동력은 바로 화가이다. 그것은 온전한 화가의 장소이자 화가의 구역으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자아의 현시인 것이다. 특히 배후의 시간과 눈앞의 시간 사이의 공간은 이중적인 것들에 대한 부단한 콜라주로 간척된다. 써니킴은 캔버스의 틀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 밀착된 캔버스 천 위에 즐겨 작업한다. 이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에게 펼치고 말아 이동하기 용이하기에 그러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단단한 벽 위에 틈 없이 붙여 한 공간의 온전한 일부가 되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은 풍경을 이루는 지평선 구도와 그에 반하는 수직의 궤적들이 교차하며 일궈내는 자신만의 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켜켜이 이어진 지형과 그 위를 돌연히 훑고 지나가는 불모지가 교행하며 만들어내는 풍경의 플롯은 자신의 삶을 엮어내는 시공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붙잡아낸 내적 반향의 표상일지 모른다. 더욱이 그의 작업에 종종 등장하는 폴(pole)은 그러한 반향이 응집된 자의식의 영역 표시와 같다. 사라진 소녀들이 기거하는 풍경은 조용히 메아리치는 배후의 시간이 전도된 공간이면서, 동시에 신기루와 같은 현재의 영토 속에 펼쳐지는 명백한 장소인 것이다. 폴은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존의 공간과 피안의 풍경을 횡단하는 수직의 가교와 같이 서 있다. 피안의 풍경은 교복 입은 소녀들의 목소리가 지닌 음향의 씨앗으로 숲이 되었지만, 이제 그곳은 온전한 현재이자 아득한 영토로 우리 앞에 메아리친다.
글 / 구나연 (미술비평)
1) 나쓰메 소세키,『한눈팔기』,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6, 89.
2) 사뮈엘 베케트,『프루스트』, 워크룸프레스, 2020, 50.
3) 가스통 바슐라르,『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23, 299.
INSTALLATION VIEW “Echo”, 2024. Courtesy of the Artist and A-Lounge.
2024. 10. 25. (Fri) – 11. 20. (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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