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Soft Steps, Rustling Leaves

찰랑찰랑, 사각사각

INSTALLATION VIEW “Soft Steps, Rustling Leaves“,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A-Lounge.

 

내면과 실재의 만남, 은신과 교류의 교차
류동현 미술비평,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중국 송대(宋代)에 벼슬과 가족을 뒤로 한 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던 임포(林逋)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중국 절강성 항주 서호의 높은 산에 집을 짓고 주변에 매화를 심어 그 꽃을 즐기며 20년 동안 은거하며 마을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 매화와 은거처사의 고사(故事)에 매력을 느낀 우리 선조들은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곤 했다. 19세기 그려진 전기(田琦)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조희룡(趙熙龍)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등이 대표적인 예다. 화면 전체가 봄의 꽃과 나무들이 꽉 차있는 숲 속에 숨어있는 작은 집, 그 창 속에 옅은 실루엣의 인물이 그려져 있는 표영실의 신작 <봄봄>을 처음 보았을 때 이 ‘매화초옥도’가 떠올랐다.

3월 8일부터 29일까지 에이라운지에서 열리는 표영실의 개인전 <찰랑찰랑, 사각사각>은 2023년 갤러리 담 전시 이후 2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가 천착해 온 내면의 섬세한 감성을 풀어낸 작업들과 함께 새로이 변화한 화풍의 작업 22점을 선보인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미술이라는 예술에 접목시키고 이것을 작가 작업의 ‘고갱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근대기 이후였다. 물론 오래 된 미술 작가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미술감식이라는 미술사 방법론이 있지만, 이는 작가를 구분하고 특정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작동하지, 이를 작가 작업의 가장 주된 개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즉 동시대에 이르러 작가의 정신 세계, 개성, 관심사는 그 작가의 작품 그 자체로 평가된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으로 소급하느냐,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느냐 등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작업 경향이 나뉘는 것이다. 과거 몇 번의 전시를 통해 살펴본 표영실의 작업은 작가의 내면과 삶의 편린 등이 섬세한 필치로 표출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작가의 내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함을 뜻할 게다.

작가의 작업을 평할 때 등장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작가가 놓치거나 지나쳐 버리는 일상의 감정들을 세심하게 포착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한 비평가는 “이 세계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감정에서부터 사회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 현상들이 분해되는 순간들을 감지하여 포착해낸다”고 이야기 한다.1) 또 다른 비평문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편한 듯 결코 편하지 않은 그의 그림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연약하고 소심하여 외면당한 상념들, 감정의 앙금과 기억의 편린들로 채워진다.”2) 이렇듯 작가는 삶 속에서 겪는 다양한 일과 느끼는 점들의 깊은 곳들을 건드린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섬세한 ‘건드림’은 작가의 삶에 대한 일종의 강박적인 태도에서 기인한다(글을 쓰기 위해 방문했던 작업실의 완벽히 정리정돈된 풍경 또한 아마 작가의 성격과 태도를 드러내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어떤 것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 작가의 내면이 만들어 낸 작업 결과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화면 속의 완벽함(혹은 이를 추구함)을 느낄 수 있다. 잘 짜인 구성, 섬세한 붓질, 색상, 명암의 부드럽지만 미묘한 그라데이션, 정교한 연필의 라인이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여러 도상들과 결합되어 화면을 메꾸고 있다. 특히 인물, 물방울, 원 등 그가 보여주는 여러 도상들은 도식적이지만 작가가 일상 속에서 느낀 점, 포착한 점을 내면을 통해 드러내는 장치로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 단순히 아름답거나 귀여운 도상이 아닌, 하나의 관념이나 내면의 상태를 드러내는 ‘메타포’로서 작동을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작가의 섬세한 감정의 변화와 강박증을 잘 드러낸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변화를 꾀했다. 이러한 작가 내면 속에 침잠한 감정을 포착한 작업과 함께 변화한 작업의 결과물을 선보인다. 이는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작가가 선보였던 작업 방식에서 기인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한 작업 노트에 “신기루에 가까운 완벽과 안전을 바라는 심정과 정리의 습관들은 시간이 쌓인 만큼 견고한 것이 되었고. 그리기(붓의 움직임)는 가능한 나의 통제 하에 이루어 지길 바랐으며 점점 그것이 가능한 상황이 되도록 스스로를 몰아갔다”라고 썼다. 작가는 수십 번, 수백 번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칠한 섬세하지만 얇은 물감의 표면이 지나치게 작업 자체를 견고하고 딱딱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자신이 삶에서 겪은 일상의 ‘소소한’ 감정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너무 ‘묵직해진다’고 할까. 전시 제목인 ‘찰랑찰랑, 사각사각’은 그 변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다. 좀더 가벼워지고자 하는.

이 변화는 작업 제작 방식과 태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1층 전시장에 선보이는 <숲속에서>는 세로 130cm, 가로 162cm의 큰 작품이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섬세한 필치 작업과는 달리 100호 크기의 캔버스를 꽉 채운 나무들은 호방한 느낌이 드는 붓 터치부터 기존의 섬세한 붓 터치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숲의 풍경은 작가가 과거의 집이나 원, 인물 등을 통해 표현한 닫힌 구조의 프레임이 아닌 열린 구조의 프레임이고, 내면의 풍경에서 실재 풍경으로의 확장이다. 빼곡하게 채워진 나무들 사이에서 얼굴이 가려진 사람이 한 명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점을 드러낸다. 이렇듯 내면에서 실재로 확장이 이루어진 것에는 강박증이라는 삶의 태도에 대한 변화를 꾀함과 동시에 작가 주변 환경의 변화도 영향을 끼쳤다. 2020년 에이라운지 개인전 이후 파주로 작업실을 이전하면서 주변의 풍경을 사생하게 되었다(서울과 가깝지만 나름 시골 풍경이다). 내면의 단상에서 실제에 대한 관찰로 확장하면서 작가는 정신 속에서 잘 직조된 구성에서 실제 자연의 자유롭고, 흐트러진 구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인물과 풍경이 조합된 이 화면은 그래서 현재 작가의 변화를 드러낸다. 그리고 전시의 수행성 면에서 확장한 형식의 작업과 과거 내면 작업을 병치 설치했다. 작가의 변화하는 작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이 작품 옆에는 <어둠속>이 걸려 있다. 흡사 숲 속의 얼굴 없는 인물 같기도 하다). 두 작업을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또 하나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띈 것은 글의 첫 부분에 이야기했던 작업이다. <봄봄>은 임포의 고사에서 드러낸 은둔의 미학과 조선 말기 회화에서 보여준 <매화초옥도>의 교류, 소통의 바람을 양가적으로 보여준다. <신기루>, <은신> 등은 그러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작업들이다. 도상의 분위기가 과거 동양화의 작풍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부터 작가가 그려왔던 집의 형태 또한 숲의 풍경과 맞물려 위에서 언급한 ‘매화초옥도’나 ‘매화서옥도’를 떠올리게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여기에 <어스름>이나 <밤의 소리>같은 작품 속의 색은 조선시대 <일월오봉도>를 연상시킨다. 이들은 내면의 관념과 실제의 풍경이 결합된 일종의 ‘사변적 풍경화’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 속 ‘문인화(文人畵)’의 세계에서 이를 볼 수 있었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이야기와 실재 풍경의 컬래버레이션이 자연스레 이 전통의 문법을 따른다.

인간은 나이를 먹고 성장한다(어느 시점이 지나면 이 단어는 성숙으로 변화 하지만). 그러나 극적인 변화는 아니다. 어렸을 때 느끼고 형성되었던 정신 세계에서 약간의 변주를 가할 뿐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나이듦’과 이를 통한 성장(혹은 성숙)의 어떤 지점을 보여준다. 견고할 것 같았던 젊은 시절의 우리는 결국 또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간다. 어떤 것으로부터든 혹하지 않던 불혹(不惑)에서 이른바 융통성이 있는 이순(耳順)으로 변하는 것을 깨닫는 것(지천명(知天命))이 삶의 이치이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물론 많은 방황도 하게 된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정말) 약간의 변화와 성장을 하게 된다. 그 섬세하고 세밀한 과정을 우리는 표영실 작업 속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찰랑찰랑, 사각사각’한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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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관훈, 2020년 에이라운지 전시 <잠깐 내려앉은 온기에 살갗이 한 겹 녹아내린다> 전시 서문 중에서.
2) 이승민, 2021년 드로잉룸 전시 <당신은 없다> 전시 서문 중에서.

 

INSTALLATION VIEW “Soft Steps, Rustling Leaves“,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A-Lou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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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3. 08. (Sat) – 03. 29. (S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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