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KI WON

박기원
1964
South Korea

박기원의 작품은 반드시 혼자서 보러 간다. 다른 이와 함께 갔더라도 한 번은 시간을 내서 다시 보러 가고 작품 곁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옆 사람의 기분이나 반응이 신경 쓰이는 순간 작품 감상은 글렀다고 보고, 다시 전시장을 찾는다. 특히 설치

작품일 경우 나의 전체, 감각과 생각 모두가 그의 작품에 감응하기를 바란다. 박기원 작품의 그러한 미묘함은 어떻게 만들어내는 것

인지 잘 모르겠다.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작품들은 대개 컨셉추얼한 요소를 가지고 있고, 미술 담론 내에서 관람자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이 나의 편견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경계(警戒)에 가까운 태도를 가지게 되고, 지적 호기심이 발

동하는 정도의 경우에 텍스트 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박기원의 작품을 대할 때는 쉽게 무장해제 되어 전시장 안에서 흐르는 시간을

기꺼이 즐기게 된다. 그의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과 형태들이 나의 시간 속에서 흘러간다. 신체를 감싸는

압도적인 규모의 설치 작품을 할 때도 박기원은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려는 의도보다는 모종의 배려심이 느껴질 정도인데, 그런 감

상에 대해서는 아직 작가와 이야기 나눈 바 없고 나도 여전히 생각 중이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딱 부러지게 시원한 대답을

들려줄 것 같지는 않다.

대형 설치가 주 작업인 작가는 작업실에서 무엇을 하는가. 일시적으로 전시장에서 구현되었다가 사라지는 운명의 설치 작품을 위해

작업실에서 재료 실험을 할 수는 있지만 계속 실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 공간이 주어져야 구체적인 설치의

고안을 할 수 있으므로, 평상시의 작업실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기원은 그림을 그린다. 그의 설치작품이

보여주는 컬러들은 미묘하면서도 은유적이고 강렬한데, 평면 작품도 그러한 특성이 묻어난다. 한 사람의 작가가 가지고 있는 감각은

재료가 달라지더라도 비슷한 지향점으로 향해 가기 때문이리라.

이번 전시에는 그의 캔버스 작품들이 많이 출품되었다. 그는 캔버스에 오일 스틱 등으로 무수한 선을 그어 결과적으로 기하학적 추

상이라고 가름될 만한, 멀리서 보면 풍경의 언저리쯤에 해당되는 그림을 그렸다. 풍경이 연상된다고 했지만 그의 작품 제목은 그러

한 해석으로부터 중립지대로 달아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대개 ‘넓이’, 혹은 ‘넓이’에 추가적으로 연번을 붙이는 방식으로 제명이 되

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전시 내에서도, PVC 비닐로 만든 커다란 볼링핀 모양을 가로로 누인 작품에 <럭키>라는 인간적인 제목을 붙

인 것과는 정반대로, 대개의 평면 작품에 ‘넓이’라는 추상적인 제목을 부여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넓이를 가지지 않은 것이

란 실현되지 못한 ‘잠재적 형태’에 불과하므로, 작가의 시간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은 모두 ‘넓이’이다. 이는 사선을 무수히 그은 평

면에 <수평>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보다 더 모호하고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수평’은 인간 중심의 개념이다. 물론 수평을 만드는 것은 지구의 중력이고, 중력장 위에 인간이 서 있기에 수평과 수직을 구분한다.

박기원의 그림 속에서 수평과 수직과 사선을 바라보면서, 20세기 초 화가 테오 반 되스부르크(Theo van Döesburg)의 작품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반 되스부르크의 작품은 몬드리안과 거의 흡사해 보이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기질의 사람이었고, 수직과 수평

이외에 사선을 쓰는 문제로 논쟁한 후 결별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신지학(Theosophy)의 영향을 받았으나, 몬드리안은 세계의 기본

요소로 수직과 수평만을 인정했고, 사선을 도입한 반 되스부르크의 작품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몬드리안의 작품을 45°

돌리면 반 되스부르크의 작품과 거의 동일해 보였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선’이 그림 속에 들어오는 것을 몬드리안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반 되스부르크는 그림 안의 것만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반 되스부르크는

인간이 만드는 공간에 대한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화가였고, 실내건축가였고,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이른 죽음이 그의 미래를 앗아

가지 않았더라면, 구체적인 공간으로 뻗어나가고자 했던 그의 의도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조형적 정의를 두고

이념적으로 다툴 수 있었던 지난 시대는 그 자체로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박기원의 사선은 반 되스부르크가 했던 것처럼 세계에 대

한 비밀에 대해 말해주고자 하는 것일까. 플랜C에 한 줄로 배치되어 있는 그의 <넓이>들, 넓이 87번, 넓이 90번, 넓이 91번, 넓이

92번, 넓이 93번, 넓이 94번을 보면 비로소 무수한 사선들을 통해 깊이감이 전해져 온다. 이 연작은 녹음이 짙어 그늘이 푸르러 보

이는 화창한 여름날의 풍경 같았다.

글: 이윤희(미술평론가) [이런 날씨 어때? 4인 그룹전{김지원, 박기원, 정승운, 채우승} 도록의 글에서 박기원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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