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Braiding Futures
미래 땋기
INSTALLATION VIEW “Beneath Branches”,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WWNN.
숲과 감각적인 것에 대하여
* (…)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p. 14.)
* 중세 때 남자들이 영주의 전쟁이나 십자군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시골의 여자들은 완전히 홀로 숲속에서, 오두막에서 몇 달이고 고립된 채 남아,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독이 뼈에 사무쳐 나무들에게, 식물들에게, 야생동물들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지요. 다시 말해, 뭐랄까요, 자연과 소통하는 재능을 찾아낸 거죠. 아니 되찾아낸 겁니다.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재능과 다시 이어졌던 거지요. 사람들은 그런 여자들을 마녀라고 불렀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셸 포르트, 『뒤라스의 그곳들』, 백선희 옮김, 뮤진트리, 2023, pp. 13-15.)
*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2025)는 생기 없는 숲의 적막함을 보여준다. 검버섯 낀 얼굴처럼, 짙은 흙빛으로 뒤덮인 숲의 계절은 겨울이다. 서늘한 어둠이 화면 전체를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이 회화는 시각적인 경계를 뚫고 나오는 이상한 색채, 그 푸른 빛의 파동으로 드러나 버린, 마치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질감을 쏟아낸다. 마른 가지와 몸통만 남아 있는 숲의 나무들과 그 사이를 과도하게 채우고 있는 건초의 배열은 일제히 숲에 매복해 있는 어떤 실체의 양감을 상상하게 한다. 말하자면, 저 숲의 어둠 속 풍경으로부터 분리된 채 되레 화면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갈색 질감이, 어느 순간 숲의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 있는 짐승의 웅크림으로 변환되는, 마술 같은 상상이 일어난다. 그것이 숲에서 온 것인지, 그림 안에서 일어난 일인지, 그 구분조차 모호하다.
김그림의 회화는 바깥 풍경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한 “그리기”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본 것을 그리는 이 단조로운 행위가 그의 지각과 상상에 마법 같은 균열을 일으켜, 그는 이내 어떤 존재와 마주하게 되는 몸의 감각을 알아차린 듯하다. 갈색 물감 묻힌 붓을 손에 쥐고 흰색 캔버스를 향해 다가가며, 자연스러운 선, 경직되지 않은 유연한 선을 마침내 하나의 평면에 쌓아 올려 나가는 그의 그리기 행위는, 숲을 산책하며 관찰했던 그의 몸에서 측정된 동작,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을 테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자꾸만 얼굴에 달라붙는 숲에서의 생경함 같은 것 말이다. 숲의 풍경 속에 매복해 있는 유연한 선들, 그것이 매개하는 감각의 균열, 유령의 존재를 알아차리(려)는, 탈중심화 된 주체에 대한 자각, 현실의 가장자리를 서성이는 몸의 리듬, 그러한 존재자들의 대립 혹은 연결로 구축된 비선형적인 세계가 화면을 에워싼다.
* (2025)에는, 매일 뒷산을 산책하다가 발견한 둥지가 등장한다. 둥지는 최근 김그림의 회화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로서, 고산지대 트레킹을 통해 경험했던 여러 지각과 정서와 감각이 뭉뚱그려진 대상이다. 낯선 타지의 풍경에서 접했던 미지의 풍경을 그려오던 그가 동네 뒷산 풍경을 관찰하기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할머니가 사시던 통영의 자연을 어떤 특정 계절에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게 되었던 사건 때문이었을 테다.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시공간의 체험과 그것이 촉발시킨 정서와 감각이 풍경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고하게 함으로써, 어떤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쓰러진 나무 몸통들 틈새에 (마치 누군가가 죽은 나무를 지붕 삼아 지은 움막처럼) 새 둥지가 있고, 둥지 가장 깊은 곳에 하나의 알이 놓여있는 는 수수께끼 같다. 화면 오른쪽 경계를 따라 수직으로 그려진 나무 몸통 사이에는 파란색 새의 윤곽이 그려 있고, 이 파랑은 화면 전체를 감싼 색채로 확대된다. 땅인지, 물인지, 풀인지, 얼음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화면 한가운데의 저 파랑은 무언가의 그림자가 투영된 매끈한 표면 같으면서도 어떤 빛에 의해 일시적으로 색을 얻은 어둠, 짙은 흙빛의 어둠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중적인 감각이 연쇄하는 숲의 풍경은 대자연의 경이감에서 시작해, 비인간적인 풍경에 대한 지각으로부터 촉발된 감각의 변이로 이어져 회화적 생성에 관한 당위를 보여준다.
“숲의 관찰자”라는 말은, 김그림의 그림을 경유해, 나에게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했던 “리듬분석가”처럼 들린다. 숲을 산책하는 몸의 감각, 그것으로 인한 주체와 대상의 “복합적인 운동 상태”, 그러한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세계를 다시 인식하게 되는 감각과 사유 등을 생각해 보면서 말이다. 르페브르는 “리듬분석가는 관찰 중인 ‘몸’의 내부에서 외부로 ‘도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리듬을 기준으로 삼아 대상 안팎의 리듬을 함께 듣고 연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외부는 내부로, 내부는 외부로 통합된다”고 했다.(앙리 르페브르, 『리듬분석』, 정기헌 옮김, 갈무리, 2013, p. 91.)
다시 앞에 서 보자.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고산식물이 지닌 기이한 촉각적 질감에 압도되어 피부를 온통 뒤덮은 짐승의 털처럼 어떤 동물성과 결합된 식물의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날을>(2025)처럼 말이다. 그것은 꽃인데, 꽃술이 훤히 들여다 보이도록 만개한 꽃 한 송이가 줄기며 이파리, 꽃잎마저 미세한 털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리한 환경, 풀과 나무와 땅과 하늘마저 부드러운 털처럼 유연한 선들로 빼곡히 그려진 것이다. 김그림은 고산식물이 환기시킨 촉각성을 회화적 행위로 변환시켜 선의 질감이 매우 시각적으로 구축된 화면을 만들게 된 셈이다. 그는 이내 “숲”과 “둥지”라는 화두로 옮겨 가, 선적인 그리기의 반복적 행위[신체]와 회화의 대상[풍경]이 공유하는 감각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할머니의 죽음이 매개된 통영의 숲이다. 그는 생기 없는 숲에서 한 짐승의 죽음과도 같은 흙빛 어둠을 목격했고, 그 속에 깃든 재생의 감각을 알아차렸다. 숲의 어둠,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생명의 근원, 모든 생명체의 미분화 상태를 환기시키는 수수께끼의 푸른 빛이 서린 추상적 양감,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눈의 감각 말이다.
* <그 밤에 우는 새>(2025)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김그림은 바우어 새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그의 회화 속 선들의 감각적 집적에 대한 당위를 물어다 준 새를 화면(혹은 숲)에 직접 출현시켰다. 새라는 존재가 지닌 곡선의 추상적 요소뿐만 아니라, 그는 새가 변신하듯 날개를 폈다 접는 날개짓을 반복하며 숲의 버려진/죽은 선재(線材)를 이용해 둥지를 짓는 일련의 상황에 주목했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의 전환을 매개하는 (새의) “둥지짓기”가 그에게는 시각적 감각과 촉각적 감각을 병합시킨 일련의 감각적 존재로서 (자신의) 회화와 동일시 되는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비인간의 삶의 방식을 통해 인간을 돌아보는 방식을 연구해왔”음을 밝힌다. 이어서 “인간, 식물, 광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이 서로 의지하며, 유기체와 무기체가 혼합되어 공존하는 장소로서의 ‘생명권(biosphere)’의 관점을 탐구”한다고 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풍경 회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잔이 환기시킨 회화의 감각은 주체와 대상, 그리고 재료와 감각 사이의 유동성을 제시한다. 인간/주체에게 귀속된 지각과 정서 작용이 아닌, “주체가 스스로를 비우고 대상으로 되어가는 과정”처럼 말이다.(전영백, 『세잔의 사과』, 한길아트, 2008, p 206.) 르페브르가 말한 대상과 통합된 리듬 분석가로서의 주체도 그렇다.
* <산이 사는 곳>(2025)은 그가 숲을 바라보는 특유의 시선을 보여준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내부 깊숙이 향하는 관찰자의 시선은 흙빛의 어둠과 죽은 나무의 거친 질감을 가로질러 부드럽고 유연한 선들의 세계를 향한다. 그것은 그의 붓질과 동일시 되어, 회화의 가장자리로부터 저 중심으로 향하는 감각의 변환을 말해준다. 그것은 마치 짐승의 육체와도 같아서, 숲을 거닐며 그것과 교감했던 중세의 마녀들이 (되)찾아낸 침묵의 기호 같은 것일 테다.
거시적인 것[숲]과 미시적인 것[둥지], 살아있는 것[새]과 죽어있는 것[나뭇가지], 어둠[갈색]과 빛[파란 색]의 극단적 대비를 가로질러, 이 둘의 비현실적인 공존으로, 김그림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역할을 전복시킬 만한 어떤 회화적 행위를 찾아내려 했던 것을 아닐까 싶다. “숲”을 입술로 소리 내며 그 이미지를 상상하고 싶어 했던 한 소설가의 독백 같은 문장처럼 말이다. 언어 이전의 형태, 형태 이전의 형상…
김그림이 그린 숲은 그러한 상상과 관련하여, 어떤 기억을 동반한다. 육체, 특히 모체에 관한 기억이다.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내부와 외부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는, 어둠과 빛을 동시에 지닌, 시각과 촉각의 범주를 뭉뚱그려 놓는, 원초적인 고립의 장소로서 모체를 상기시킨다. 마치 직물을 짜듯, 저 죽은 식물의 선을 가지런히 매만지며, 마법 같은 날개짓의 시간만큼 소요된 행위로, 둥지를 탄생시킨, 감각의 논리를 보라.
<남들과 다른 둥지를 짓는 일>(2025)은 자연스럽게 (2025)로 향하게 한다. 숲의 텅 빈 어둠, 그곳에서 감각적 존재로서의 회화적 질감과 양감을 표현한 김그림은, 죽은 나무의 표면에 시각적 틈새를 그려 넣는다. 그림 그리는 이, 그가 말하는 둥지짓기의 은유는, 무심한 선 긋기의 반복적 행위가 생성시킬 회화적 감각, 그것에 대한 믿음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회화를 본다는 것을 넘어, 그것을 감각한다는 것은, 다시 숲으로 돌아가, 새의 움직임과 그 안에 매복해 있는 짐승의 웅크림을 알아차리는 일처럼, 주체와 대상 사이의 긴밀한 얽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_안소연 (미술비평가)
INSTALLATION VIEW “Beneath Branches”,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WWNN.
INSTALLATION VIEW “Beneath Branches”,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WWNN.
2025. 08. 19. (Tue) – 2025. 08. 31.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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